OPEN NOTE 열린옷장 생각노트


아무노트파타고니아×열린옷장×정영음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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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 코리아의 유튜브 채널에서 ‘쓰레기 시대(The Shitthropocene)’라는 필름 영상을 봤다. 현대 소비지상주의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왜 우리는 언제부턴가 필요 이상의 물건을 사고, 늘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쓰레기가 된 물건들 때문에 환경오염이 가속되고 있는 상황을 경계하고 저지하려는 파타고니아의 활동도 나온다.

 

(스포주의) 주로 낚시할 때 입는 방수 멜빵바지인 웨이더의 신상 런칭을 앞두고 문제가 생긴다. 방수 천을 잇는 이음새에 물이 새 결국 방수가 되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다. 웨이더는 이미 제작되었고 불량품이라고 해서 전량을 그냥 폐기할 수는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그렇게 개발한 것이 방수 테이프다. 기대를 안고 방수 테이프를 이음새에 붙여 보았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좌절을 뒤로하고 모든 팀원이 머리를 맞대 고민하던 중 누군가 아이디어를 낸다. 방수 테이프를 덧붙이자고. 단순하고 사소한 아이디어에 다들 반신반의했지만 실험 결과는 성공이었다. 신상 웨이더는 모든 이음새에 방수 테이프가 이중으로 붙은 채 무사히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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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옷장이 떠올랐다. 옷장 곳곳에서도 낭비하지 않으려 고민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장에서는 어떤 물건이 필요하거나 쓰던 물건이 고장 나면 바로 새로 사기보다 고쳐서 다시 쓰거나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자급하려 노력한다. 철사 옷걸이로 뚝딱 만든 바코드 스캐너 거치대나 대여자가 사용한 페이스 커버를 바닥 청소 때 쓰는 모습을 보면 재활용‧재사용을 향한 집념/생활의 지혜/리빙 포인트라고도 하는 알뜰살뜰함이 느껴져 좀 사랑스럽다. 아이디어를 아이디어에서 끝내지 않고 구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옷장에 기증 들어온 의류는 우선 대여 가능 여부로 분류된다. 대여 가능한 옷은 관리를 거쳐 5층에서 대여되고, 대여 불가 판정이 난 옷은 옷캔이라는 환경 NGO에 재기부한다. 올해는 옷캔으로 보내기 전에 단계 하나가 더 생겼다. ‘제로핸즈’라는 중고마켓 채널을 오픈한 것인데 자원 순환은 물론, 옷을 보내준 기증자의 기운을 구매자가 더 개인적인 경험으로써, 실체로써 전달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담겼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을까 계속해서 궁리한다. 못 입는 바지로 구두 파우치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와 바지 밑단의, 손바닥보다도 크기가 작은 덧댐천도 버리지 말고 모아서 뭔가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도 실현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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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정은임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MBC 아나운서인 그는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에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어 이번에 특집방송이 기획되었다고 한다. 故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방송 ‘여름날의 재회’라는 타이틀이다. 1부는 다큐멘터리이고 2부는 AI로 구현한 정은임의 목소리로 라디오가 진행된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사람들이 기꺼이 모여 그와의 추억을 정답게 이야기하고 시간이 지나서도 그를 기억하려 애쓰는지 궁금해졌다. 라디오를 플레이하고 오프닝을 듣자마자 그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지만 나 또한 그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하게 되었다.

 

때가 묻어 좋을 것 없겠죠. 모두가 꺼리는 일이잖아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대한 동경은 그래서 생겼을 겁니다. 하지만 묻을수록 좋아지는 때가 하나 있더라고요. 바로 손때가 그렇습니다. 손때 묻은 책 한 권, 손때 묻은 살림살이. 그런 것들이 저는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새 집을 짓는 대신 오래된 집을 고쳐 사는 어떤 분이 인터뷰에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집보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집이 나는 더 좋다. 그런 마음일까요. 반짝반짝 빛이 나는 프로그램도 많은데, 반질반질 윤이 나는 이 프로그램을 계속 좋아해주시는 이유가요.

 

비록 AI가 구현한 목소리에 그가 직접 쓴 원고도 아니지만 그래도 정영음이 어땠을지 분위기가 보인다. 사회를 향한 따뜻한 말과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분명 많은 사람들을 어루만져주었을 테다. 세월이 갈수록 반질반질 윤이 났을 이 사람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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